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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문사

    용문산에 있는 신라시대에 세워진 사찰.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649년(진덕여왕 3) 원효대사가 창건하였고, 892년(진성여왕 6)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창하였으며, 고려 공민왕 때 나옹(懶翁)이 중수하는 등, 중 ·개수를 거듭하였고, 조선조인 1447년(세종 29)에 대대적인 중건이 이루어졌다.그 후 1907년(융희 1)에 왜군의 병화로 전 건물이 소실된 것을 당시의 주지 취운(翠雲)이 소규모로 재건하여 유지해 오던 중 그나마 6 ·25전쟁 때 파괴되어 현재는 3칸의 대웅전과, 관음전 ·산령각(山靈閣) ·종각 ·요사(寮舍)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절에는 조선 전기의 정지국사(正智國師) 부도 및 비(보물 531)가 있다.

    용문사에는 수령이 100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다른 오래된 은행나무와 달리 곧게 뻗어 올라가 있는데 가을철 모든 잎이 노랗게 물들면 멋진 장관을 이룬다.

    이 은행나무는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태자가 신라 멸망 후 금강산으로 들어가다가 꽃아 놓은 지팡이라는 유래가 있다.

    이런 유래 때문인지 나라에 큰 재난이 있을 때면 은행나무가 운다는 말까지 있다.

    이 은행나무는 천연기념물 제 30호로 지정되어 있다용문사의 은행나무(천연기념물 제30호) 이 나무는 현재 우리나라에 생존하고 있는 은행나무들 중에서 가장 크고 우람하며 오래 된 것으로 용문사 대웅전 앞에 위치하고 있다.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여 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60여 미터에 줄기의 가슴높이 둘레가 12.3m를 넘어 동양에서는 가장 큰 은행나무이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이 그의 스승인 대경 대사를 찾아와서 심은 것 이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세자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에 심은 것이라고도 하고,신라의 고승(高僧)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뿌리가 내려 이처럼 성장한 것이라고도 한다. 

    많은 전란으로 사찰은 여러 번 피해를 입었지만 특히 정미의병이 일어났을 때 일본군이 의병의 본거지라 하여 사찰을 불태워 버렸으나 이 은행나무만은 불타지 않고 살아 남았던 나무라 하여 천왕목(天王木) 이라고도 불렀고 조선 세종(世宗)때에는 정3품(正三品)의 벼슬인 당상직첩(當上職牒)을 하사(下賜)받기도 한 명목(名木)이다.

    이 나무에는 또한 전설이 있다.

    옛날 어느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을 때 톱 자리에서 피가 쏟아지고 맑던 하늘이 흐려지면서 천둥이 일어났기 때문에 중지하였다 하며 또한 나라에 큰 변이 있을 때 소리를 내었다고 하는데 고종이 승하하였을 때에는 커다란 가지가 1개 부러졌고 8.15해방과 6.25 사변 때 에도 이 나무에서 이상한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용문사 정지국사 부도 및 비(보물 제531호) 이 부도는 지대석(地臺石)과 하대석(下臺石)이고 중대석(中臺石)이 원형(圓形)이며 그 위가 8각형(八角形)의 평면이나 팔각원당형(八角圓堂形)의 기본형을 따른 것이다. 

    석비(石碑)는 장방형(長方形) 대석(臺石)위에 개석(蓋石)없이 비신(碑身)을 세웠는데 상단 좌·우를 귀접이 하였다.

    이 부도는 미지산[彌智山·현 용문산(龍門山)]에 조안(祖眼)등이 세운 것 이며, 비는 태조(太祖)7년(1398) 당시 학자이며 명신(名臣)이었던 권근(權近)의 글로 만들어 세운 것이다.

    정지국사(正知國師1324∼1395)는 고려말(高麗末)의 고승(高僧)으로 호(號)는 축원(竺源), 속원(俗名)은 김지천(金智泉)이다. 고려 충숙왕(忠潚王)11년(1324) 황해도(黃海道)재령(載寧)에서 태어나 19세에 장수산(長壽山) 현암사(懸巖寺)에서 승려가 되었다.

    공민왕(恭愍王)2년(1353) 30세에 자초[自招·무학대사(無學大師)]와 함께 중국(中國) 연경(燕京)에 들어가 법원사의 지공(指空)을 찾아보고 그에게 법을 이어 받은 혜근[惠勤·나옹선사(懶翁禪師)]에게 사사(師事)하였다.

    그 뒤 함께 각지로 다니며 수도(修道)하다가 공민왕5년(1356)에 귀국하였다.

    벼슬이 싫어 몸을 숨기고 수행에만 힘쓰다가 천마산(天磨山) 적멸암(寂滅唵)에서 입적하였는데 화장 후 많은 사리가 나왔다. 정지국사로 추증 되었으며, 시호는 정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