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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나사

    사나사는 신라 경명왕7년(923)에 고승인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제자 융문과 함께 창건(創建)하고 5층 석탑과 노사나불상(盧舍那佛像)을 조성(造成)하여 봉안(奉安)하고 절 이름을 사나사(舍那寺)로 하였다. 고려 공민왕 16년(1367)에 태고왕사(太古王師) 보우(普愚)가 140여칸 규모로 중건(重建)하였으며 고려 우왕 8년(1382) 12월 24일 보우(普愚)스님이 용문산 소설암(小雪庵)에서 입적(入寂)하였는데 이듬해인 1383년에 문인(門人) 달심(達心)이 태고(太古)의 부도와 비를 사나사에 세웠다. 

    선조 25년(1592)에 일어난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사찰이 불타버린 것을 선조 41년(1608)에 단월(檀越) 한방손(韓芳孫)이 재건하였다.

    영조 51년(1773)에 양평군내(楊平郡內) 유지(有志)들이 뜻을 모아 당산계(堂山契)를 조직하고 향답(鄕沓)을 사찰에 시주하여 불량답(佛糧沓)을 마련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경내에 비를 세웠다. 

    순종(純宗) 원년(1907)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義兵)들의 근거지라하여 사찰을 모두 불태웠다.

    그후 2년뒤인 1909년에 계헌(戒憲)이 큰방 15칸을 복구하였으며 1937년에 주지(住持) 맹현우(孟玄愚) 화상(和尙)이 대웅전(大雄殿)15칸을 재건하고 조사전(祖師殿) 5칸을 지었다. 

    1950년에 일어난 6.25사변으로 인해 사찰이 전소(全燒)된 것을 1956년에 주지(住持) 김두준(金斗俊)과 함문성(咸文成)이 협력하여 대웅전(大雄殿) 산신각(山神閣) 큰방 등을 재건하고 함씨각(咸氏閣)을 지었다.

    1993년에 현 주지(住持) 한영상(韓榮相)이 대웅전(大雄殿)과 지장전(地藏殿)을 재건하였다.

    경내에는 도유형문화재 72호인 원증국사석종탑(圓證國師石鍾塔)과 도유형문화재 73호인 원증국사석종비(圓證國師石鍾碑)가 있다. 문화재로는 사나사원증국사석종탑(경기도유형문화재 72) - 원증국사는 고려 말기의 고승 보우로 호는 태고 시호는 원증, 탑호는 보월승공이다. 

    국사는 13세에 회암사 광지선사에 의해 중이 되었다.

    충숙왕12년(1325)에 선과에 급제하였으나, 명리를 버리고 감로사에서 고행하였으며 삼각산 중흥사 동봉에 절을 짓고 태고사라 이름하였다.

    충목왕 2년(1346)에 원나라에 가서 청공의 법을 이어받아 임제종의 19대 법손이 되었다.

    충목왕 4년(1348)에 귀국하여 소설암에서 수도를 하고 왕사, 국사가 되었으며 소설암에서 입적하였다. 

    석종은 국사의 묘탑으로서 화강암으로 건조하였으며 탑신과 탑정, 대석으로 구분된다. 

    탑신은 표면에 아무 조각이 없고, 상하는 수평을 이루었다.

    탑정에는 화염문을 조각한 낮은 보주가 얹혀 있다. 

    대석은 1매석으로 가로, 세로 각각 1.1m로 탑신과 접하는 곳에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전체높이는 2.75m이다. 사나사원증국사석종비(경기도유형문화재 73).- 고려말기의 고승 원증국사 보우(圓證國師 普愚)의 탑비(塔碑)이다. 사나사(舍那寺)경내 함씨각(咸氏閣) 오른쪽에 세워져 있다. 

    이 비는 자연암반으로 된 지대석을 파서 비신(碑身)을 끼워 세웠는데 비신 양옆에 장방형 기둥을 세워 비를 보강하였고, 위에는 밑이 둥근 반구형(半球形)의 옥개석(屋蓋石)을 얹어 비신(碑身)을 보호하고 있다.

    이러한 형식의 비는 1379년에 세워진 여주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驪州神勒寺 普濟尊者石鐘碑)와 근본적으로 유사한 것이나 보다 간략화된 형식임을 알수 있다. 

    옥개 및 기단,비신의 일부등이 파손되어 비문(碑文)의 완전화 전문(全文)은 알수없다. 그러나 비문(碑文)은 정도전(鄭道傳)이 지었고 글씨는 재림사주지(梓林寺住持)인 선사 훤문이 썼으며 우왕12년(1386) 문인 달심(門人 達心)이 세웠다는 사항들을 대개 알 수 있다.